AI cover 와 아이돌 공백기 # 가짜가 진짜를 이기다
AI cover와 아이돌 공백기에 관하여
퇴근을 하여 늘어져라 YouTube로 노래를 듣다가 문득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요즘 내가 자주 듣는 곡들 중에서 항상 일정 비율은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낸 음악임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 들었던 것은 5월 초다. 동생이 AI 커버 곡을 소개해준 것이다. 그 곡은 우리나라에서 워낙 인기를 끌었던 하입보이를 Bruno Mars가 커버한 곡이었다.
이 조합은 불가능에 가까울거다. 한국어를 저렇게 유창하게 익힌 브루노마스가 하입보이의 인기가 가시기 전에 재빠르게 커버곡을 내는 것 말이다.
커버곡을 만드는데 베이스로 사용한 곡에 재미있는 댓글이 달렸다.
“님 브루노마스 됬어요”
이 영상을 처음 보았던 5월부터 매일 내가 듣는 음악에는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커버곡들이 포함되어 있고 점점 그 비율이 더 늘어나고 있다.
내가 왜 인공지능 커버 곡을 듣는지 생각해 보았다. 단순한 이유다.
- 듣고 싶지만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들을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 가수가 이미 활동을 오래 전에 끝낸 가수이거나 또는 외국 가수라서 언어적 장벽이 있거나 또는 지금 기나긴 공백기를 가지고 있는 아이돌일 수도 있다. 또는 그 가수가 부를 의사가 없거나.
그러나 들을 수 있다.
듣는 사람이 들을 의사가 있으니 말이다. 마치 커버곡의 주체가 바뀐 것 같기도 하다. 부를 생각이 없어도 듣고 싶으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댓글에는 한 소절도 부르지 않은 가수에 대한 칭찬이 가득하다. 물론 역시나 노래 실력에 대한 칭찬은 없다. 다만, 그 가수의 고유한 음색에 대한 아름다움을 칭찬한다.
노래에서 목소리의 유사함만 즐기는 것인가?
지인 중 한사람은 이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사진에 필터를 넣은 것처럼 음악에 필터를 끼워넣는 처사라고.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로 갈아끼우기일뿐이라는 거다.
방탄소년단은 지금 현재 군입대로 단체 활동을 잠정 중단 한 상태이다. 이후에도 7명 완전체가 곡을 다시 내더라도 예전과 같은 댄스곡을 될지 의문이다.
근데 오늘 ‘BTS ai cover’를 검색어로 YouTube에서 영상을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일곱 명이 모두 부른(듯한) 커버곡들이 꽤 여럿 올라와 있었다. 진작 이걸 검색해보지 않았다니!
그 중에는 내가 요즘 자주 들었던 곡도 있었다. (이곡은 최근 개봉한 분노의 질주 OST이자 방탄소년단은 멤버 지민이 참여 하기도 했다. 실제 곡에는 나머지 파트를 외국 가수들이 참여 했다.)
지민의 목소리는 실제 참여했고 나머지 파트까지 방탄소년단멤버들이 함께 부른 것처럼 만든 것이다.
출근길 마다 들었기 때문인지 커버 곡을 들을 때 원 가수의 목소리가 얼핏 얼핏 들리긴 하였으나 매우 자연스러운 편이었다.
두번째로 발견한 곡은 스트레이 키즈의 in S-class 라는 노래다.
어찌나 실제 목소리들 같은지 듣는 내내 반갑고 좋았다.
마치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 같았다.
아니 적어도 활동을 시작한 것 같다.
이제 내가 계속 AI 커버를 들을테니 말이다.
이렇게 커버 영상을 찍어낸다면, 아이돌들의 공백기는 물론이고 활동 중에도 다양한 컨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든다. 이건 가수들 입장에서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를 일이다. 물론 이정도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목소리로 먼저 다가와 인지도를 쌓고, 어느 정도의 고도에 올라야할테지만.
내가 이렇게 인공지능에 창작물을 매일같이 즐기고 좋아하고 있었다니 놀라웠다.
나는 매우 즐기고 있다.
사실 나는 이미지 생성서비스나 글을 생성하는 서비스는 즐기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음악은ㅎ 이게 없었던 대로 돌아가는 건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인공지능이 무언가를 대신 한다는 게 그러니까 어떤 유일한 것을 대신한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좋아하는 가수가 직접 같은 곡을 실제로 커버했어도 AI 커버곡을 듣는 경우도 있다. 곡의 일부가 아닌 전체 길이를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운 사람이나 볼 수 없는 사람, 세상을 떠난 사람의 목소리를 인공지능이 대신 하는 때가 오면, 그때 나는 경계심 없이 받아들이겠구나.
걱정과 놀라움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항상 인공지능 기술이 의인화된 형태로 슬쩍,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려고 했다.
사람과의 관계나 기억을 대신하려고 하는 것을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걸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미리 나의 기준을세워야 된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오늘 보니 나는 이미 그 경계심을 무너뜨린 듯하다.
그간 경계한다고 생각해왔기에 마치 패배하거나 굴복한 듯이 ‘무너지고 있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정말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것 아닐까ㅎㅎ
# 추가
저번달에 현실을 모사한 가상의 게임이 치료에 활용된다는 사실을 접했더랬다. 그래픽이 그닥 실감이 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다만 그 환자가 겪었던 사고 장면을 그 환자가 기억하는 대로 자세히 재현한다. 이 영상을 보며 군인은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막힘없이 이야기한다. 어쩌면 얼마나 실제 같은 지 보다는 얼마나 그 장면을 보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