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간에 DMZ를 가르칠 때, 다른 어떤 영상보다도 이 영상을 보여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직업병인지 어딜 여행을 가든 학습자료 수집욕구를 끊지 못한다. 올해 미술교과도 가르치다보니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전시관을 둘러본 탓이지 싶다. 전시관 밖에서 영상작품의 원본을 감상할 방법을 끝내 발견하지 못했지만, 트레일러 영상은 찾아냈다. 이거라도 사회시간에 꼭 보여줘야겠다.
DMZ가 만들어진 때로부터 100년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2025년 현재 71주년을 넘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489년일까? 무슨 숫자길래 500년에 가까운 것일까?
영상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사진 속 병사들은, 사진 뒷 편에서 사진 속 대열을 간직한 채 3D로 구현되어 앉아 있다. 이렇게 사진 속 평면적인 이미지가 입체적으로 변하는 순간은, 이 영상에서 'DMZ에 관한 수많은 뉴스나 영상들에서 다루었던 내용들'과 달리 매우 개인적이고 자세한 이야기가 전개될 것임을 미리 말해주는 듯 했다.
목차
1. 489년, 뭘 보여주나? 왜 489년인가?
2. VR, 3D 기술로 만들어야 하는 것들
3. 사회시간에 전했던, 받아왔던 DMZ 교육에 대한 회고
1. 489년, 뭘 보여주나? 왜 489년인가?
영상 작품 <489년>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비디오 작품이다. 작년 기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권하윤 작가의 작품은 총 5개가 전시되었는데 그 중 하나다.
참고로 <올해의 작가상 2024> 전시는 이번 달 3월 23일까지다. 2주 밖에 남지 않았다. 다른 갤러리나 미술관에서도 전시되었던 작품이니 이번 전시를 놓치면 또 언젠가 다음 기회를 기다려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기약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조금 서둘러 다녀와보길 추천한다.
뭘 보여주나?
2016년 제작한 (일부 기사에는 2015년으로 나옴) <489년>이라는 영상 작품은 VR매체를 활용한 작품이다. 직접 영상 속 3D 공간을 둘러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는 영상 형태로 관람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11분 18초라는 시간이 짧게 느껴지며, 내가 보려고 켠 영상이 아닌데도 시작부터 몰입이 되는데 그 이유는 나레이션 덕분이라 본다.
비무장지대에서 실제 근무했던 전직 군인이 직접 자신의 시각에서 보고 겪고 느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간의 생생함과 긴장감,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환상처럼 영상과 함께 전달된다. 1인칭 시점으로 DMZ를 걸어나가기 때문에 마치 함께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앞으로 DMZ가 사라진다면 어떤 기분일지에 대한 의외의 대답, 그곳에서만 겪을 수 있는 개인적인 기억을 꾸밈없고 담담한 말투로 전달해준다.
다행히 찾아낸 트레일러는 2분 남짓으로 영상에서 꽤 인상적이었던 시작과 끝이 없어 많이 아쉽지만, 나레이션 목소리와 DMZ의 밤 풍경을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다.
< 489 Years> 트레일러
왜 489년인가?
DMZ가 만들어진 때로부터 100년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2025년 현재 71주년을 넘기고 있을 뿐이다.
그럼 도대체 왜 489년일까? 생겨난지도 100년이 안되었는데 뭐가 500년이나 가까운 것일까?
489년이란, 2010년 우리 국방부의 데이터에 따라 추정한 이 지역에 매설되어있는 지뢰를 모두 제거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다. 앞으로 기술이 발전하며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매년 100여명의 병사들이 이 지뢰들 때문에 목숨을 잃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점에서 끔찍한 현실은 그대로 진행중이다. 200만 개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측된다.
2. VR, 3D 기술로 만들어야 하는 것들
처음 집에 오큘러스가 생겨서 VR로 게임이나 여러 가지 체험, 영상을 보았던 때가 떠올랐다. 워낙 초기여서 컨텐츠가 많지 않았지만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들이 새롭게 등장해 기대되기도 했다. VR은 이제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기술이 되어가고 있다. 그 이후 등장한 메타버스는 어떤 VR장비를 갖추느냐에 따라서 조금 아쉬움이 생길 수 있는 가상현실 공간을 더 가깝고 쉽게 접할 기회를 만들어주었다고 느꼈다.
다만 현실에서 접하는 것이 가능하고, 더 효과적인데도 가상으로 구현해낸 것 일부 컨텐츠들을 접할 때마다 기술을 위해서 컨텐츠를 만든 것이지, 컨텐츠를 위해서 기술을 사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몰입도 설득도 되지 않는 컨텐츠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반면 489년이라는 3D영상은 영상 속 '비인가자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통과하는 스릴감과 긴장감에서부터 느껴지는 '현실에서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라는 조건을 쉽게 충족하고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이 어떠하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수많은 DMZ 소개 영상과 달리,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1인칭 시점에서 들으면서, 함께 그 공간을 걸어나가기 때문에 강력한 몰입감을 준다.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생생하게 전해주기 위해 기술이 제 역할을 해주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 수업에서 DMZ를 설명하는 여러 영상을 아이들과 함께 보았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희귀한 다양한 동식물이 보존되어있다.'라는 문장이나 서식 중인 동식물 사진 자료를 보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었다.
후반부 나레이션과 영상에서는 다소 환상에 가까운 DMZ의 밤 풍경 속 고요함과 신비한 자연의 모습이 담겨있다. 잠시 동안 길을 잃은 주인공이 두려움과 함께 고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경험은 DMZ 속에 보존되어있는 자연의 경이로움이 어떤 느낌일지 강하게 전달해주었다. 그동안 그렇게 다양한 교육자료와 사진자료를 봤는데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느낌이었다.
3. 사회시간에 전했던, 받아왔던 DMZ 교육에 대한 회고
초등학교 5학년 사회 수업 중 DMZ에 관해 다룰 수 있는 수업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물론 교사 재량으로 늘릴 수 있기에 나름 시간을 할애해 DMZ의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다.
그동안 수업에서는 비무장 지대에도 사람이 사는 마을이 있으며, 그 대성동 마을의 초등학교를 보며 신기하면서도 다른 점들을 들려주었다. 같은 초등학교라는 공통점 속에서도 다른 점이 흥미로울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특수한 환경이라는 그 자체로도 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와 함께 DMZ라는 공간이 형성된 이유, 보존된 낙원에 가깝다는 자연환경을 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곳을 매일 들어가는 병사들의 시각이나 DMZ 인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 그리고 결코 동식물의 낙원이 아닐 수 있는 이유는 놓쳤던 것 같다.
489년 작품에서는 초반에 다리를 잃은 멧돼지가 등장한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 70여 년이 지났다고 해서 '낙원'이라는 묘사는 틀린 것이다.
수많은 지뢰의 피해가 동물에게도 가고 있음을 너무나도 바보같이 놓친 것이다. 마치 자연과 사람이 DMZ라는 공간에서도 분리되어 살고 있으리라는 착각이었고, 동식물을 은연중에 '배경'에 놓은 인간 중심적인 생각이었다.
더구나 위아래로 2km로 꽁꽁 막아 놓은 완벽한 장애물은 동식물의 교배에서 다양성을 감소시키는 문제까지 낳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살고 있는 '대성동 마을'이 있는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환경'이라는 말부터 이미 모순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람의 손에 의해서 벌목도 흔히 일어난다.
내가 그동안 가르쳐왔고 알고 있던 DMZ와는 다른 시각의 작품을 본 덕분이다. 영상을 보고 잔잔하게 남은 감상과 궁금한 것을 조금 더 검색하다보니 저절로 많은 생각이 든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권하윤 작가의 '증거부족'에 대한 포스팅을 이어가려고 한다. 이 역시 현재 같이 전시중인 작품인데 완전히 다른 소재, 다른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날 보고 온 전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작품이었다. 모처럼 재밌고 이해가 가는 좋은 비디오 작품들이었다.
이 영상은 사람과 자연을 모두 다루고 있어 좋다. 길이가 길어 수업에서 활용하기에는 부담이 있을 것 같지만.
'디자인,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페이스의 가치는 경계를 나누는 것, 로제타석 이야기 (4) | 2025.01.08 |
---|---|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과정_ 활자와 생성형AI의 공통점 _ 타이포그래피 (2) | 2024.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