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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 대학원/논문 책 리뷰

[인물] 사울 레이터 : 평범하게 비범한 사람

by 팡귄 2024. 4. 1.

1945년 8월 피트버그 예술센터에서 그가 35점 수채화와 소묘 전시회를 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주간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보인 반응은 놀랍다.
"아버지가 우셨어요. 부끄러워하셨죠. '이제 모두가 알게 됐다'면서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사진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 뭘 전하려는지 이해도 안 가는 경우가 있거나, 2) 이게 왜 잘 찍은 사진이 되는 건지, 어떻게 전시까지 하는지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째, 1) '뭘 전하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를 정면으로 돌파한 전시를 본 적이 있다.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본 사진전이었는데, 역시나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놀란 적 있다.
사진마다 사진의 모서리나, 사진 여백에 빼곡하게 이 사진으로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써놓은 전시였다.
예술가가 '이렇게 사진을 읽으세요' 써놓은 게 호불호가 갈리겠다만, 나는 이 글자들이 관람객의 감상을 막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오히려 어쩌면 이렇게 섬세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대상을 발견했는가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이 말을 전하기 위한 정확한 순간과 각도를 대단히 잘 찾아냈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간 사진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에 '뭘 전하려는지 이해도 안 가는 경우'는 많은 타협을 본 상태였다.

다만, 2) '이게 왜 잘 찍은 사진이 되는 건지'는 와닿는 경우가 없었는데, 우연히 광고에서 본 사진은 저 위의 작품은 달랐다.

와 색깔이 이쁘다. 그림같다. 그림자가 많다. 사진의 구도가 멋지다. 대단하다.
이렇게 단순한 흐름으로 감상하였는데, 이 사진이 바로 사울 레이터라는 따뜻한 할아버지의 작품이었다.

 앞서 그의 일화로 보았듯이 그를 연민으로 바라보게 되는 가족사가 있지만, 이 인물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이런 배경 때문만이 아니다. (예술가의 작품집이나 인터뷰를 통으로 읽은 경우가 아마 겨우 3번째인 듯 한데, 술술 읽히는 책은 또 오랜만이었다. 번역도 잘했다.) 이 인물에 대한 페이지를 넘길수록 참 괜찮은 사람이었구나 느껴진다. (간혹 작품을 좋아했다가 사적인 부분을 알면서 환상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말이다)

 저자가 인터뷰를 어렵게 얻었던 작은 일화부터 시작하여 사울레이터와 사적인 관계, 제자와 스승의 관계로 발전하여서 오랜 기간 지켜본 그를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이 두꺼운 책에서 묘사하는 사울 레이터에 대한 문장들을 보면 그에 대한 존경심, 애정이 듬뿍 느껴진다. 문장마다 그게 자꾸 드러나서 그런지 나도 그런 마음으로 그를 보게 된다. 그런 와중에 내 마음이 움직인 일화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누드 사진작품들을 생전에 끝내 공개하지 않은 일화다. 

천막이 멋지게 드리워진다. 꼭 산이 둘러싼 마을 같았다.

 소위 예술가에게는 필수 조건인 듯한 뮤즈(?)라고 해야할 소중한 인물들이 그에게도 몇 명 있는데, 그 역시 이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러나 인상적인 것은 (저자의 표현이지만) 그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인지 그들을 찍은 작품을 생전에 세상 밖에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평소 자기 작품을 친한 친구들한테는 실컷 보여주면서도 정작 전시하는 데에 소극적인 사람이어서 그랬겠거니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 와중에도 내가 기이하게 느꼈던 예술가들과의 다른 태도가 꽤 느껴졌다. 그는 모델들의 사진에 작은 메모를 두었는데, 그와중에 '뉴욕에 사는 OO'이라는 인물을 정작 사진 메모에는 '도쿄에 사는 ㅁㅁ'라고 거짓으로 적거나  '옆집 주인 딸'이라고 애매모호하게 적는 등 가짜(?) 이름을 남겨서 그들의 신상이 함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그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을 지켜주는 그의 세심한 성격이 보였다.

 이 일화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안그래도 앞선 사진들로 이미 감탄하고 있었던 차인데. 사람 구경하러 나갔다는 길 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그의 외롭고도 따뜻한 시선들도 마음에 들었는데, 이 일화까지 아주 콱 마음에 들었다.

 뮤즈라고 하여 아내와는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한다거나 여러 일화로 보아 여성 편력이 심하고, 성격이 좀 기이하거나 괴팍한 경우, 그러나 훌륭한 예술가라서 이런 점이 용인(?)되는, 이해되는 그런 인물들을 볼때마다 사실 영 마음이 가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옛날 시대의 인물들이라 아마 그 시대에는 도덕적 가치관이 현저히 달랐나보다 짐작해보지만, 꼭 저래야만 하나 싶은 생각은 가시지않았다.

 


 그에 반해 사울 레이터는 어찌 보면 참 평범하면서도 비범하다. 괴짜거나 괴팍하지도 않고 뭔가 예술가의 필수조건 같은 특징이 없다. 아버지의 큰 기대를 받으며 이에 부흥하기 위해 공부에 몰두했던 시기덕분인지 그는 매우 상식적이고 조심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부모의 기대를 과감히 저버리고 연을 끊고 뉴욕으로 이사와 예술가로 살았는데, 뉴욕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일생 벗어나지 않고 이 엄청난 작품들을 남겼다고 한다.

 사진을 찍기위해 여행을 다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을 보면, 그는 아마 뉴욕에서 매일 다른 일상을 보고 충분히 새로운 다채로움을 느낀 것 같다. (뉴욕이라면 그럴만도 하지 않나 싶기도!)


 그리고 굉장히 한결같은 사람이다. 항상 그림을 그렸으며 세상을 떠나기 2주 전까지도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보면 그는 사진가라기에는 화가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림 같다. 그림을 카메라로 그린 것이다.

유리창이나 거울을 잘 사용해서 그런가 붓으로 그린 느낌이 더 들었다.


 사진마다 붙은 제목, 인물들에 대한 시선이 따뜻하다. 그리고 그의 사진들이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연출한 장면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회화는 구석에 놓인 선 하나까지도 오로지 화가에 의한 흔적인데, 사진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델의 얼굴 표정을 요구해도 재배치(?)는 할 수 없는 노릇이며, 요즘처럼 보정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나 그림처럼 오로지 화가만 관여한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드 사진에서도 마음에 들었던 것은 모델들의 표정이나 자세다. 모델들의 표정이 능동적이거나 자유로웠기 때문에 작가와 모델이 함께 만든 사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나머지 사진 작품들도 그러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포즈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캐롤'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만, 아무래도 곧 봐야겠다. 그의 작품에 영감을 받았다 한다.

내가 읽은 책은 <사울 레이터 100주년 기념 에디션>이라는 책이다. 책 자체가 엄청 두툼하고 무겁다. 300장이 넘는 페이지마다 이야기와 사진들이 선명하게 담겨있어 5만원 대라는 가격이 오히려 저렴해 보였다. 전시도 못 가본 마당에 아주 감사했다.
그가 잡지화보 사진 작품도 했는데 b컷과 최종 선정된 작품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b컷이 좀 더 멋지다 하는게 한 두 개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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