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잠시 '망한 디자인 대회'를 열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이틀 연달아 망한 디자인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2개 가지고는 대회는 좀 무리다 싶어서 더 가짓수가 많아지면 해야지 하고 있다가, 올해 초 만난 책에서 강력한 후보에 오를만한 망한 디자인을 더 발견했다.
그러나 반가움을 뒤로 하고 한 걸음 뒤에서 생각해보기로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돌아보면, 의도하지 않았거나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규칙을 어겼을 뿐이었다. 규칙을 깬 결과는 참담했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오늘 이책을 읽어보니 이 작가가 이 책의 디자인을 봤으면 얼마나 호되게 혼을 냈을지 상상이 가서 웃음이 났다.
책 제목을 보라.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
'원칙'이라는 단어도 강렬하지만, '첫'이라는 단어로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강렬한 어휘가 표지에 박힌 책이다.
또 책의 한 쪽짜리 간결한 서문을 보면, 이글은 그가 1930년에 작성한 에세이며 본문의 몇 줄을 제외하고는 원고를 고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시간의 흐름과 변화 속에서 '나의 원칙 중 조금도 후회하거나 아쉬울 것이 없어 바꿀 필요가 없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목차
1. 책의 구성
2. 타이포그래피와 원칙
3. 건축과 타이포그래피가 공통으로 갖는 두 원칙 : 봉사자의 예술
4. 전통과 원칙의 의미
5. 전에 만났던 그 이상한 디자인
1. 책의 구성
이책은 타이포그래피의 원칙을 설명하고 타이포그래피의 역할과 방향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에게 전통이 무엇이며 원칙은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책이기도 하다. 원칙은 간결하면서도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획일화를 이끌고 변화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당연하게도 그의 글은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의 갈등을 이끌어냈다. 이에 그는 적절한 비유와 단호한 어조로 반박 겸 설득을 위한 논설문을 완성해두었다.
흥미롭고 얇은 이 책(이책의 주요 내용은 50쪽에서 끝난다. 예시나 부연설명이 많지 않고 간결하다.)은 서울공예박물관 내 작은 도서관에서 약속을 기다리다가 집어들었다. 사실상 10분도 안되는 시간이어서 당시에는 10장도 채 넘기지 못 했었다. 단호한 어조는 계속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뜬금없게도 집 앞의 도서관에서 이책 다시 발견했다.
어떻게 이와 같이 단호할 수 있을까 싶고 또 책의 나머지를 어떻게 채웠을지 매우 궁금했다.
책의 구성은
현재 책의 <서문> + <타이포그래피의 첫 원칙>
+ 1967년에 재출간할때 <추가한 몇 줄>
+ 1967년 책의 <서문> + <후기> 로 50쪽에서 마무리된다.
그리고 뒤에는 <주석>이 이어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검은 색지로 구분이 되는 뒷부분에는 이용제, 박지훈, 김수정 디자이너의 글이 덧붙여 있다. 작가의 원칙에 더하여 지금의 디지털 책이나 우리 나라의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이야기들로 책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덧붙인 글이 본 책에 딱 알맞게 어울린다. 책의 이야기를 지금으로 끌어와 확장시켜주면서도 친절히 우리들의 이해를 마무리하도록 돕는다.
2. 타이포그래피와 원칙
스탠리 모리슨씨는 서두부터 '타이포그래피'는 무엇인지 말한다.
주석에는 '글자의 형태를 다루거나 글자를 이용하여 디자인하는 기술, 또는 표현'으로 정리했다. 책의 전반에 걸쳐서는 인쇄되어 나오는 지면 위에 어떻게 글자를 놓아야하는지를 설명한다. 여기서 책이 출간된 1936년을 고려할 때, 당시의 책은 종이책이며 1967년도까지 다시 인쇄되어 나오기까지도 여전히 종이책만 존재했었다. 전자책에 대한 이야기는 뒤의 박지훈씨의 글에서 다루어진다. 그래서 지면을 어떻게 조판하고, 어떤 비율과 서체로 독자의 시선을 고려해야할지가 담겨있다. 요즘 전자책들은 내 입맛대로 글자체부터 글자 크기까지 조율할 수 있으니 타이포그래피의 원칙들이 전자책이라는 매체의 등장으로 어떤 변화를 마주해야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물론 다시 말하지만 이책은 종이책에 대한 이야기다.
원칙이 필요한 이유
스탠리 모리슨 씨만의 개성이나 취향이 담긴 디자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의 시각적 편의를 위해서 '이것들을 이렇게 두어야한다.', '이것을 관련시켜야 한다.'등의 원칙을 제안하고 있다.
일관되게 독자를 위해서 어떤 것이 더 나으며, 그래서 이런 원칙이 필요함을 설명한다. 본질은 실용이고, '간혹' 미적인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 말그래도 '간혹' 아름다운 것이다.
글에서 스탠리 모리슨씨는 아닌 것은 아주 명료하고 비판적으로 정리한다. 광고나 선전물이라면 참신한 시도가 필요하지만, 서적에 있어서는 (한정판은 제외하더라도) 관습에 의존해야한다고 강조한다. 대개 관습이라면 낡은 것, 혹은 오래 이어졌으나 어느정도는 새롭게 바꾸어야 할 대상으로도 느껴지는데 말이다.
'참신한 시도'는 50부 정도의 소책자정도에서 실험적인 시도는 할 수 있어도, 5만부 이상 찍는 책에서 실험을 하는 것은 상식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ㅎㅎ책 내내 이런 일관되면서도 여지도 주지 않는 문장이 매력넘친다. 그러나 책의 <후기>에 들어서서 그 단호함이 단지 성격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확고한 철학과 타이포그래피가 존재해야할 이유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참고로 5만부는 생각보다 적지 않다. 김영하 작가가 2년전 초판으로 3만부를 찍었다는 기사도 있다. 물론 책이 나오기도 전에 다 팔려 더 찍어내야했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초판은 1 ~ 2천부를 찍는다고 한다.
책에 실린 일부 원칙들을 가져와봤다.
- 글자 크기는 행 길이와 연관되어야 한다. 10~12개의 단어로 구성된 행이 가장 편안하게 읽히고, 독자가 두번 읽는 더블링을 방지할 수 있다.
: 독자의 편의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래서 만들어진 원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어가 줄이 바뀌면서 끊어지지 않아야함도 이야기한다. 이 책은 번역본이지만, 저자의 원글에서는 영어 단어를 어떻게 배치했을지 궁금해진다.
- 글자가 높이에 비하여 폭이 넓은 것도 있고, 반대로 폭이 좁은 것도 있다.
: 영어에 해당되는 설명이다. 가령 영어 중 c, o 등처럼 공간이 들어간 글자들은 글자 사이를 넓어보이게 만들거나 실제로 넓힌다는 것.
- 대소문자를 섞어서 조판하면 높이가 고르지 않으므로 전체를 전부 대문자로 적용하는 것이 좋다.
- 페이지마다 들어가는 표제는 각 장의 내용이 잊혀질때 다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해준다.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배치하면 두페이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줄 수 있다.
: 표제가 없는 책도 많은데, 이책은 페이지마다 표제가 있다. 페이지 헤더, 페이지 헤딩 등이라고 분리며, 인쇄된 페이지의 맨 위마다 놓이는 작은 제목이다. 사전에는 가장 위의 단어를 올려서, 현재 페이지에서 어떤 단어를 실었는지 찾을 수 있고, 일반 책에서는 페이지의 중심 내용을 담은 제목을 담기도 한다.
이 책은 원칙을 잘 지키고 있을까? 아쉽게도 한글로 쓰인 글이라 저자의 원칙들을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보인다. 그래도 안그라픽스에서 낸, 또 주제가 타이포그래피인 책이다 보니, 정석을 보여주려는 듯이 페이지마다 아주 정갈한 구조를 갖추고 시각적인 편안함을 선사한다.
재밌게도 모든 장마다 여백이 많다. 꽤 작은 책인데도 여백을 이렇게 많이 쓰면 내용이 적게 담기지 않나 싶은데, 그럴만한 이유를 책에서 살짝 추측해본다.
그리고 매 쪽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작은 제목이 상단 중앙에 정리되어있다. 내가 무엇에 관해 읽고 있는지 적절히 상기시켜주면서도 작은 크기의 글자라 시선을 빼앗지 않았다.
3. 건축과 타이포그래피가 공통으로 갖는 두 원칙 : 봉사자의 예술
원칙을 말하는 중에도 독창성을 배제하라는 것이 아니라며 오해말라는 설명도 나온다.
[필수적인 세부사항에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 텍스트를 획일적으로 보여주자는 뜻은 아니다. 도입부 페이지는 타이포그래피적 독창성을 발휘할 여지를 최대한 제공한다.]와 같이 독자가 읽는 데에 할애하는 공간이 아니라면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쨋거나 중요한 것은 표현이 독자의 편의보다 앞서면 안된다.
타이포그래피와 인쇄는 문명을 위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중요한 원칙이 정해진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다양한 매체로 지식과 생각을 나누는 때와 달리 당시의 책의 위상도 한 번 고려해봐야할 것이다.
4. 전통과 원칙의 의미
작가가 <후기>에서 정리한 논설문의 일부만 발췌해보았다. 후기에서는 전통이 무슨 의미인지 왜 가치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건축과의 비교는 금새 공감이 되었다. '그렇구나.' 싶었다.더불어 전통에 대한 정리는 이해가 잘 되었다. 마침 이책을 발견한 곳이 국립공예박물관이라는 점이었는데 '예술 공예 분야 종사자'와 그들이 이어가는 전통에 대한 설명이 등장해 신기했다.
전통을 일상에서 바로 만나볼 곳은 다양하다. 그럼에도 작가가 예시를 든 것 처럼 '전통 공예'를 접하면, 특히 그 정교함과 우직하게 이어온 공예 방식 그리고 그곳에 담긴 정신에 더 감탄하기 쉽다. 지금 국립공예박물관 3층에 가면 나전칠기 공예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지난 주말에 이 작업에 참여했던 분들의 성함을 볼 수 있었ㄴ는데 이들의 생애에 걸쳐 그리고 또 다음 세대에 걸쳐 어떤 것들이 축적되어갈지 기대된다.
<후기> 역시 긴 글은 아니다. 원칙에 대해서 조금 더 그 당위성이나 가치를 더 장황하게 이야기해주지 싶었다. 충분히 간결하게 담겨 있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뒤에 덧붙인 한국 디자이너들의 글에서 나머지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었다.
박지훈 디자이너의 글을 보면 전자책과 종이책에서 느끼는 그 묘하고 불편한 글자 배열의 차이가 무엇에서 오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수정 디자이너의 글은 원칙이 우리가 딛을 수 있는 발판이자 파괴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생각을 확장시켜준다.
원칙은 새로운 기준과 규칙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돕는 발판이자, 아이러니하게도 더 나은 원칙을 존재하기 위해 파괴되어야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발판'이라는 정리는 깔끔하다.
무엇의 당위성이나 지켜야할 이유를 찾을 때는 그것이 어떤 것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것이 무엇과 닮았는지를 떠올려 보아야겠다.
5. 전에 만났던 그 이상한 디자인
쪽수를 찾지 말고 무아지경으로 책을 읽기를 바랬던 것일까?
하지만 목차에서 원하는 내용을 찾아가야 할 필요도 있는 내용의 책이었다. 처음에는 쪽수가 잘못 인쇄되지 않은 책인 줄 알았다. 그러나 책을 힘껏 잡아 당기니 파란색 얇은 띠로 된 내부가 드러나면서 그 안에 페이지가 적혀 나왔다.
혹시 책의 홀짝페이지를 잘못 맞춰 책의 밖으로 향했을 면이 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닐까 살펴보았지만 표지부터 짚어넘겨보니 의도한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이상한 디자인이었다. 책을 휘리릭 넘기면 218쪽을 찾으려면 200쪽 쯤이다 싶을때 책을 활짝 잡아당겨 가운데의 페이지를 확인하고, 220쪽 쯤 왔나 싶을 때 다시 책을 양쪽으로 한 번더 잡아 당겨 페이지를 확인해야했다. (책을 활짝 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끔찍하겠다.) 그리고 218쪽인지 확인을 위해 책의 중앙을 잡아당겨 완전히 펼쳐내야했다.
무슨 의도 였을까.
대학생 시절 타이포그래피라는 것을 우연히 접하고 약간의 흥미를 가졌더랬다. 그래봐야 글자인데, 곡선의 작은 차이나 가로 길이의 미묘한 변화만으로도 그 느낌이 뒤집힌다니 놀라웠다. 그 느낌은 우리가 매일 접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가령 로고를 몇 년 만에 바꿨다는 브랜드들 속 글자를 보면서 각자 나름대로 그 차이를 감상하고는 하는 것이다.
책을 보고 정보를 얻을 줄 알았는데 이책은 논리적인 생각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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